여러 의사가 나눠 진료했을 때의 책임 — 협진·인계·정보 전달과 ‘신뢰의 원칙’
큰 병원에서 한 환자를 한 의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일은 드뭅니다. 응급실 의사가 처음 진찰하고, 영상의학과 의사가 사진을 읽고, 수술은 외과가, 마취는 마취과가 맡으며, 병동에서는 교대로 당직 의사가 바뀝니다. 그러다 사고가 나면 병원 안에서는 "그건 우리 과 일이 아니었다"는 말이 오가기 쉽습니다. 여러 의사가 나눠 진료했을 때 책임을 어떻게 보는지 정리합니다.
서로 믿고 맡길 수 있다는 '신뢰의 원칙'
대법원은 의사들이 서로 대등한 지위에서 각자의 의료 영역을 나누어 환자 진료의 일부를 분담했다면(수평적 분업), 진료를 분담받은 다른 의사의 전적인 과실로 생긴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인정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대법원 2022. 12. 1. 선고 2022도1499 판결). 학계와 실무에서는 다른 의사가 제 몫을 했으리라 믿고 자기 일에 집중해도 된다는 뜻에서 이를 '신뢰의 원칙'이라고 부릅니다. 이 판결은 의사의 업무상과실치사죄가 문제 된 형사사건으로, 대법원이 사건을 다시 심리하라며 돌려보낸(파기환송) 것입니다. 다만 의사들 사이의 역할 분담을 보는 기준은 민사 배상 사건에서도 참고가 된다고 이해됩니다.
다만 이 원칙은 '상대 의사가 제 몫을 제대로 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합리적인 상황을 전제로 합니다. 다른 의사의 판단에 눈에 띄는 잘못이 있었거나, 자기 분야에서 당연히 확인했어야 할 이상 징후를 그냥 넘겼다면, 남을 믿었다는 이유로 책임을 벗기는 어렵다고 이해됩니다.
믿으려면 정보가 제대로 건너가야 한다
분업이 안전하려면 앞사람이 가진 중요한 정보가 뒷사람에게 정확히 전달되어야 합니다. 대법원 2023. 7. 13. 선고 2020다217533 판결은 응급실에서 찍은 MRI에 척추 안쪽에 피가 고인 소견(경막외 혈종)이 있었는데 이를 진단하지 못한 채 환자를 다른 의원으로 옮긴 사건에서, 진단 과정의 잘못뿐 아니라 옮기기 전에 혈종에 관한 정보를 환자와 보호자에게 충분히 알렸는지, 그것이 하반신 마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더 심리하라며 사건을 돌려보냈습니다(파기환송). 환자를 넘기는 것으로 보내는 쪽의 역할이 끝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준 판결입니다.
받는 쪽에서 보면, 앞선 의사가 적어 보낸 내용을 믿고 진료를 이어 가는 것이 신뢰의 원칙이 말하는 분업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넘겨받은 정보가 처음부터 틀렸거나 중요한 내용이 빠져 있었다면, 뒤에서 아무리 성실하게 진료해도 결과를 막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인계·전원 사건에서는 보낸 쪽이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그중 무엇을 적어 보냈는지, 받은 쪽이 추가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지를 함께 비교하게 됩니다.
사고가 자주 생기는 '빈틈'
실무에서는 다음과 같이 일이 넘어가는 지점에서 문제가 자주 드러납니다.
- 교대·주말 인계: 낮 근무 의사가 기다리던 검사 결과를 밤 당직 의사가 확인하지 않은 경우
- 협진 의뢰: 다른 과에 의견을 물었는데 회신이 늦거나, 회신 내용이 치료에 반영되지 않은 경우
- 판독 결과: 영상의학과 판독에 이상 소견이 적혔는데 담당 의사가 이를 보지 못한 경우
- 전과·전원: 과나 병원을 옮기면서 중요한 병력이나 위험 신호가 서류에서 빠진 경우
이런 사건에서는 '누가 그 정보를 언제 받았고, 누가 확인했어야 했는가'를 시간 순서로 따지는 것이 핵심입니다.
책임이 흩어진다고 배상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환자와 가족이 병원 안의 업무 분담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같은 병원 소속 의사들의 잘못이라면 병원 개설자는 진료계약의 상대방으로서, 또 의사들을 고용한 사용자로서 배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민법 제756조). 그래서 어느 과 의사의 잘못인지가 끝까지 분명하지 않더라도 병원을 상대로 청구하는 길은 열려 있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다만 어느 장면에서 무엇이 잘못됐는지는 구체적으로 짚어야 하므로, 일이 넘어간 지점을 정확히 찾아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진료기록에서 확인할 것
- 협진 의뢰서와 회신서의 작성 시각, 회신 뒤 실제로 바뀐 처방
- 의사 인계 기록, 당직 기록, 간호기록에 적힌 의사 보고(노티) 시각
- 영상·검사 판독 보고서가 작성된 시각과 담당 의사가 확인한 시각(전자의무기록 접속기록)
- 다른 병원으로 옮겼다면 함께 보낸 진료의뢰서·소견서의 내용
이 글은 일반적인 법률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법률 자문이 아닙니다. 사건의 결론은 개별 사실관계와 증거에 따라 달라집니다.
근거 대법원 2022. 12. 1. 선고 2022도1499 판결, 대법원 2023. 7. 13. 선고 2020다217533 판결, 민법 제756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