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사고 합의서, 서명 전에 알아야 할 법리 — 부제소 합의와 뒤늦게 생긴 손해
의료사고 뒤 병원이나 병원 측 보험사가 합의를 제안하면서 내미는 합의서에는 거의 예외 없이 "향후 민·형사상 일체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들어 있습니다. 서명하고 합의금을 받으면 정말 그것으로 끝일까요. 원칙과 예외를 함께 알아야 서명할지, 언제 서명할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합의는 '화해계약'이다
법적으로 합의는 서로 양보해 다툼을 끝내기로 하는 화해계약입니다(민법 제731조). 화해계약은 원칙적으로 착오를 이유로 취소할 수 없습니다(민법 제733조). 여기에 소송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부제소 합의)이 들어 있으면, 합의 뒤에 소송을 내더라도 법원이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소송을 끝낼(각하) 수 있습니다. 다만 법원은 그런 합의가 정말 있었는지, 당사자의 진짜 의사가 무엇이었는지를 신중하게 따집니다. 그래서 합의서는 생각보다 강한 효력을 가집니다.
예외: 예상할 수 없었던 중대한 후발손해
그러나 대법원은 일정한 경우 합의 뒤에 생긴 손해(후발손해)를 다시 청구할 수 있다고 봅니다. 교통사고 합의에 관한 대법원 2000. 3. 23. 선고 99다63176 판결은 다음 요건을 갖추면 후발손해에 대해 다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 합의가 사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손해 범위를 정확히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루어졌을 것
- 후발손해가 합의 당시 사정으로 보아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일 것
- 그 손해를 예상했다면 사회통념상 그 합의금으로는 합의하지 않았으리라고 볼 만큼 손해가 중대할 것
이런 경우 피해자가 그 후발손해까지 포기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 판례의 취지입니다.
의료사고에 적용된 사례
울산지방법원은 2020. 12. 23. 선고 2019가합16716 판결에서 이 법리를 의료사고에 적용했습니다. 2011년 색전술(혈관 안으로 관을 넣어 하는 시술) 중 뇌동맥이 터져 마비와 인지기능 저하가 생긴 환자가 사고 약 11개월 만에 1억 8천만 원을 받고 민·형사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로 합의했는데, 이후 상태가 크게 나빠져 2019년 신체감정에서 노동능력을 100% 잃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법원은 합의 당시 후발손해를 예상할 수 없었다고 보아 병원의 부제소 합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병원 책임을 70%로 정해 약 5억 원의 추가 배상을 명했습니다. 합의 당시의 심사 결과와 병원이 작성한 향후 치료비 추정서에도 '약 18개월 이상 지난 뒤 호전 가능성을 판단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는데, 그보다 이른 시점에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점도 고려됐습니다.
예외는 좁다
이 예외는 어디까지나 '예상할 수 없었던 중대한' 손해에 한정됩니다. 합의 당시 이미 장해 가능성이나 재수술 가능성을 설명 들었다면, 그 손해는 합의에 포함된 것으로 볼 가능성이 큽니다. 뒤늦게 다툴 수 있다는 기대보다 서명 전에 충분히 따져 보는 것이 훨씬 확실한 방법입니다.
서명 전에 확인할 것
- 증상이 고정됐는지: 아직 치료 중이라면 서두르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앞으로의 치료비와 장해 여부를 진단서로 먼저 확인하세요
- 합의 대상의 범위: '일체의 손해'인지, 특정 기간의 치료비에 한정한 것인지 문구를 확인합니다
- 후발손해 유보 문구: '합의 당시 예상하지 못한 후유장해가 생기면 별도로 협의한다'는 조항을 넣어 달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다
- 당사자: 환자 본인 외에 배우자, 자녀 등 손해배상 청구권을 가진 가족이 함께 서명하는지, 사망 사건이라면 상속인 전원이 포함되는지
- 형사 문구: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들어가면 형사 절차의 처리와 형량에 영향을 줍니다. 2027. 5. 27. 시행 예정인 개정 의료분쟁조정법은 상해 사건에서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기소할 수 없는 범위를 넓혔으므로(시행 전), 이 문구의 무게는 더 커질 수 있습니다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서 조정이 성립하면 재판상 화해와 같은 효력이 생겨 강제집행이 가능한 대신, 다시 다투기도 어려워집니다. 어떤 형태든 합의는 사건의 마지막 단계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글은 일반적인 법률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법률 자문이 아닙니다. 사건의 결론은 개별 사실관계와 증거에 따라 달라집니다.
근거 민법 제731조, 제733조, 대법원 2000. 3. 23. 선고 99다63176 판결, 대법원 2013. 11. 28. 선고 2011다80449 판결, 울산지방법원 2020. 12. 23. 선고 2019가합16716 판결,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2026. 5. 26. 법률 제21694호로 개정, 2027. 5. 27. 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