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는 의사의 잘못을 어떻게 증명하나 — 2023년 대법원 판결로 본 인과관계 추정
의료소송을 상담하다 보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병원 잘못인 건 분명한데, 그걸 어떻게 증명하느냐"입니다. 수술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환자는 알 수 없고, 기록은 병원이 작성하며, 의학 지식의 차이도 큽니다. 그래서 법원은 오래전부터 환자 측의 증명 부담을 덜어 주는 법리를 발전시켜 왔고, 2023년 대법원은 이를 한 번 더 분명하게 정리했습니다.
원칙: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쪽이 증명한다
민사소송에서는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쪽이 요건을 증명해야 합니다. 의료소송이라면 환자 측이 ① 의료진의 과실, ② 과실과 나쁜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 ③ 손해를 증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원칙을 그대로 적용하면, 의료 과정의 전문성과 밀실성 때문에 환자가 이기기는 거의 불가능해집니다. 특히 '그 잘못 때문에 이 결과가 생겼다'는 인과관계는 의학적으로도 단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2023년 대법원 판결의 정리
대법원은 2023. 8. 31. 선고 2022다219427 판결에서, 환자 측이 진료 당시 임상의학 수준에서 통상의 의료인에게 요구되는 주의의무를 위반한 행위, 즉 진료상 과실을 증명하고, 그 과실이 환자의 손해를 발생시킬 개연성(그럴 만한 상당한 가능성)이 있다는 점까지 증명하면 과실과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추정할 수 있다고 정리했습니다. 자연과학적·의학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의 증명까지는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전신마취로 어깨 수술을 받던 70대 환자가 수술 중 심정지로 사망한 사건이었습니다. 마취를 맡은 의사가 환자 감시를 간호사에게 맡기고 수술실을 비운 사이 이상 징후가 생겼고, 대응이 늦어졌다는 점이 문제 됐습니다.
추정에는 한계가 있다
이 법리가 '과실만 있으면 인과관계는 자동'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대법원은 과실이 손해를 일으킬 막연한 가능성이 있는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또 의료진 측이 손해가 진료상 과실이 아닌 다른 원인으로 생겼다는 점을 증명하면 추정은 깨집니다. 결국 실제 소송에서는 다음이 승부처가 됩니다.
- 과실을 '구체적인 행위'로 특정하는 것: "수술이 잘못됐다"가 아니라 "어느 시점에 어떤 검사를 했어야 했는데 하지 않았다"처럼
- 그 행위와 결과를 잇는 의학적 경로를 제시하는 것: 문헌, 진료지침, 감정 결과로 개연성을 보여 주기
- 병원이 내세우는 '다른 원인'(기존 질환, 체질, 불가피한 합병증)에 대한 반박을 미리 준비하는 것
같은 날, 형사 판결은 반대로 나왔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날 같은 사고에 관한 형사 판결(대법원 2023. 8. 31. 선고 2021도1833 판결)입니다. 대법원은 형사재판에서는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의 증명이 필요하고, 민사에서 쓰는 인과관계 추정을 형사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며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했습니다. 같은 사실을 두고도 민사에서는 배상책임이, 형사에서는 처벌이 별개로 판단된다는 것을 보여 준 사례입니다.
이는 유족이 흔히 고민하는 "형사고소를 먼저 할까, 민사소송을 할까"라는 질문에도 시사점을 줍니다. 형사 절차에서 무혐의나 무죄가 나왔다고 해서 민사 책임이 없다는 뜻이 아니며, 반대로 형사 결과를 기다리느라 민사 청구 기간을 넘겨서도 안 됩니다.
환자 측이 지금 준비할 것
인과관계 추정은 결국 '과실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증명하느냐'에서 출발합니다. 그 재료는 진료기록입니다. 경과기록과 간호기록의 시간대별 활력징후, 투약 시각, 의료진 호출 기록처럼 사소해 보이는 기록이 과실을 특정하는 핵심 증거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고 직후 전체 진료기록을 확보하고, 사건 경과를 날짜와 시간 순으로 정리해 두는 것이 가장 좋은 출발점입니다.
이 글은 일반적인 법률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법률 자문이 아닙니다. 사건의 결론은 개별 사실관계와 증거에 따라 달라집니다.
근거 대법원 2023. 8. 31. 선고 2022다219427 판결, 대법원 2023. 8. 31. 선고 2021도1833 판결